씁쓸한 졸업식을 추억하며
요즘 졸업시즌을 보면서 나의 어린시절 졸업식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려지며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 전날, 잊히지 않는 생생한 기억이 떠오른다. 구정 설을 맞이하여 일가 친척집을 돌며 거금 500원을 손에 쥐게 되었고 마치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풍요로웠다. 물론 나의 형은 장남인지라 나보다는 훨씬 많은 복돈을 손에 쥐었다. 그래도 나는 별 불만이 없었고 내게 있는 것이 그저 소중하였다.
나는 이 복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한달이 넘도록 소중히 간직하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 졸업식 전 날에 형이 갑자가 나에게 화투를 가르쳐 주며 십 원짜리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재미있게 배우고 온 종일 화투치며 내기를 하였다. 물론 결론은 나의 소중한 전 재산을 탕진하였다.
노름의 쓴 맛을 초등학교 때 너무 아프고 찐하게 경험을 하였다. 형은 의기양양하게 합법적으로 내 돈을 갈취하여 사라졌고 나는 억울하고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을 삼키며 밤새 우울함을 달랬다.
형이 그리 미울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도 한마디 말도 섞지 않고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내 마음에 찬바람이 돌았으나, 그날따라 나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형이 더욱 미웠다. 문을 박차고 졸업식장으로 달려갔다.
아침 등교 길부터 내리던 싸라기눈이 졸업식 내내 내렸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고 그저 울적한 내 마음의 눈물처럼 여겨졌다. 어제의 일들이 떠오르며 화가 나서 더더욱 서글픈 졸업식이 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지방의 졸업식장에는 가족이나 어른들이 축하하기 위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오남매를 먹여 살리시고자 날품도 마다하지 않으신 나의 부모님도, 고등학교 때까지 졸업식장에 한 번도 못 오셨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형이 나타났다. 그것도 선물을 사들고 찾아왔다. 꽤 값나가는 앨범을 졸업선물로 들고 왔다.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선물을 받아든 내 얼굴은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어제의 모든 일이 이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계획된 접근이었다고 생각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역시 한마디 대꾸도 없이 씁쓸하게 앨범을 받아들고 눈을 맞으며 굳이 혼자서 걸어왔다.
지금도 눈 내리는 졸업식장을 보면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철없는 형과 철부지 동생은 그렇게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성장했다. 나의 형은 자기생각에 빠지면 남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성격은 여전하다. 그래서 지금도 의견이 부딪힐 때가 많고 그저 나는 형 앞에서는 말 수가 없어지는 편이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졸업선물을 해 준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이제는 그저 웃으며 옛 일을 추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졸업식 때는 늘상 눈이 왔다. 중학생 때 서울에 전학와서 신림동에 있는 남서울 중학교에서 졸업식을 하였고 역시 나 혼자였다. 서울은 지방과 달리 가족들이 많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눈 내리는 혼잡한 졸업식장을 유유히 혼자 걸어나온 기억이 또렷하다. 그래서 내게는 졸업식 사진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는 항상 정겹게 대해 주시던 친구 아버님이 혼자였던 나를 같이 데리고 나가 자장면을 사주셨다. 졸업식에 처음 먹어보는 자장면이었다. 평생 그분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것은 내게 소중한 기억이며 감동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성회비를 못내서 자주 혼나고 벌쓰던 기억, 중고등학교 때는 부모님 안 모셔온다고 차별 당하던 기억들... 내게는 반골 기질이 있어서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삐뚤어지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모범생이 되곤 하였다. 그래도 가족 모두가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고 정말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이었기에 불만은 딱히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하여 어렵게 들어간 대학 입학식에서도 물론 혼자였다. 어떻게 입학은 했는데 집안 형편에 2학기 등록금을 달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서 속히 군대로 입소하였다. 말년휴가 때 이웃집 형이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기에 책을 얻어 부대에 들어가서 자세히 보니 의료보험법 등이었다. 군대 시절 고참 때는 남는 것이 시간인지라 한 달간 각개전투장에서 책만 보았던 거 같다. 집에 있는 남동생에게 건강보험 공채시험 응시원서를 대신 접수해 달라고 일러두었다.
1988년 하반기로 기억되는데 마포 의료보험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시험을 특별휴가를 나와서 치렀고 용케 합격까지 했다. 경험삼아 치렀던 시험이 감사하게도 합격한 것이다. 그때 아직 군인 신분이었다. 1989년 2월 초에 제대를 하고, 곧 이어 3지구 직장의료보험조합에서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군미필은 시험자격이 없었는데 원서가 어떻게 접수되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아마 그 시절에는 행정망이 촘촘하지 못하여 확인 할 수가 없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함으로 대학은 중퇴하였고 못 다한 공부를 위해 뒤늦게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리도 하고 싶었던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즐겁게 공부하였고 4년만에 졸업을 하였다. 서른둘의 나이 2월에 결혼을 하였고 그해 3월에는 졸업을 하였다
내 인생 처음으로 가족들이 함께하는 졸업식이었다. 아내와 더불어 어머님 아버님도 함께 하셨다. 유일한 나의 졸업식장 사진이 남겨지는 날이었다.
이 날은 더 이상 눈이 오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어머니를 바라보니 강직한 아버님 덕분에 역경의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고달픈 삶이 희뿌연 머리카락에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처음으로 작은아들 졸업식에 찾아오신 부모님의 얼굴에는 새하얀 머리보다 더 밝은 미소가 가득하다.
그간 씁쓸했던 졸업식의 풍경도 쓸쓸한 내 마음도 그 날 함께 졸업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졸업식 날이 되면 일가친척들이 다모여 축하하고 수많은 사진에 동영상까지 담아서 간직한다. 영화도 보고 옷도 사고 특별한 외식도 하고 마음껏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한편으론... 누구에게나 비슷해진 풍경의 졸업식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의미 있게 추억될까? 하고 반문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의 다음 졸업식에는 새로운 이벤트를 혼자 구상해 본다. 나는 슬하에 딸만 셋 둔 아빠다. 내년에는 두 아이가 졸업을 한다. 그때 졸업식 기념으로 아이들과 함께 2박3일 자동차 없이 배낭여행을 함 떠나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물론 프로그램과 모든 계획에 대한 설계는 아이들의 몫이 되게 할 생각이다
아이들에게는 무언가 쓰리고 의미있는 추억거리의 졸업식을 안겨주고 싶은 이유에서다.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잘 시켜 나가겠다고 다짐하며 나의 졸업식 회상들을 고이 접는다.